구글에게 아직도 심각하게 부족한 것 맘에드는 기사/칼럼

개인적으로 꽤 좋게 보는 구글인데
얘들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던 걸 시원하게 얘기해놨네..

그래도 난 구글의 마인드를 더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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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출처] http://views.donga.com/read/2139


구글과 애플이라는 두 거인의 경쟁을 보면서 경쟁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느끼게 됩니다. 애플이 아이폰을 만들지 않았다면 구글은 안드로이드를 이렇게 빨리 개선시키고 발전시키지 못했을 테니까요. 모바일로 인터넷 검색을 하는 세상이 곧 올 거라는 생각은 구글의 누구라도 하고 있었겠지만,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보여준 건 애플이었습니다. 구글은 뭔가를 창조하는 능력만큼은 독재자와 그 추종자들로 이뤄진 강력한 군단에게 상대가 안 되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자유로운 영혼들의 공동체와 비슷한 (또는 그들 스스로 그렇다고 주장하는) 구글은 그 뒤 정말 미친듯이 아이폰의 장점을 흡수합니다. 편리한 UI, 다양한 응용프로그램(Apps) 등 애플이 한 건 모두 구글도 했습니다. 애플의 생각보다 아마도 훨씬 더 빠른 속도였을 겁니다.


구글이 안드로이드에 그 정도로 신경쓰지 않았다면 애플의 고객들은 여전히 멀티태스킹은 꿈도 못 꾸고, 배경화면조차 내 맘대로 바꿀 수 없는 스마트폰을 쓰고 있어야 했을 겁니다. 구글의 엄청난 속도는 애플에게 더 나은 제품을 만들어야만 하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훨씬 저렴하고,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으며, 더 좋은 품질의 통신서비스를 제공하는 통신사를 선택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폰이 시장에 잔뜩 나와있는데 여전히 주문처럼 '아이폰이 세계 최고'라고 우길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 구글은 Google I/O라는 컨퍼런스에서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구글TV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애플TV입니다. 애플이 벌써 몇년전 똑같은 이름으로, 비슷한 개념의 제품을 선보였던 그 애플식 TV죠. 둘 다 인터넷에 접속해 유튜브를 볼 수 있고, 주문형 비디오(VOD)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사업의 방식입니다. 구글은 제작 초기 단계부터 소니와 로지텍, 인텔 등 전자업계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었고,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구글TV소프트웨어는 세상의 그 누구라도 무료로 가져다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했습니다. 안드로이드OS의 경우와 유사하죠. 애플은 셋톱박스를 만드는 건 오직 애플이어야만 했고, 콘텐츠를 보기 위해서는 아이튠즈를 써야만 하도록 했습니다. 다른 전자업체와의 협력은 애초에 관심이 없었고요. 이번에도 시작은 애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폰의 경우와는 달리 TV에서는 구글이 애플보다 먼저 웃게 될지도 모릅니다.(개인적으로는 삼성전자가 애플TV의 파트너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고, 그러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애플은 그때 그동안 손놓고 있던 애플TV 프로젝트를 크게 손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 구글TV는 굉장히 혁신적이고 혁명적으로 보이지만, 큰 약점이 있습니다. 애플이 신제품을 발표할 때마다 등장했던 '그들'이 구글의 발표회장에는 나오지 않았거든요. 구글의 발표회장은 늘 엔지니어들로 가득합니다. 기술업체의 주요 임원들이 참석해 신기술의 향연을 벌이고, 기술이 모든 걸 해결할 거라 강조하죠. 오늘 발표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글의 에릭 슈미츠는 인텔의 폴 오텔리니, 소니의 하워드 스트링어 등 세계 최고 기업들의 CEO들을 구글의 잔치에 불러 모읍니다. 아무나 이런 일을 할 수는 없죠. 하지만 기술은 모든 걸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애플에게는 찾아오는데 구글에게는 찾아오지 않는 '그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콘텐츠 사업자들입니다.


애플은 아이튠즈에서 동영상을 팔기 시작하면서 디즈니(당연하게도)와 폭스, 소니, MGM, 워너 등과 콘텐츠 공급계약을 맺습니다. 음악을 팔면서도 음반사들을 소개했고, 책을 팔면서도 출판사와 신문사, 잡지사를 소개했습니다. 이런 콘텐츠 회사의 주요임원들은 간혹 스티브 잡스의 키노트 연설 가운데 게스트로 올라와 자신들의 제품을 소개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애플은 늘 콘텐츠 업체들이 만족할만한 방안을 찾아 그들에게 위축되는 산업을 지킬 수 있는 디지털 시대의 해법을 던져줬습니다.


오늘 구글은 새로운 혁명을 예고하면서 '그들'을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구글 TV의 모델은 기존 지상파/케이블 방송국의 영향력(편성권)을 대폭 축소시키고, 콘텐츠 제작자들이 수십억~수백억 원을 들여 만드는 콘텐츠와 유튜브의 UCC를 동일선상에서 노출시키는 혁명적인 모델입니다. 당연히 기존 산업의 주요 플레이어들은 탐탁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구글은 이들을 찾지 않습니다. 구글은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도서관의 책을 모두 디지털화해 검색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큰소리쳤다가 출판사들이 제기한 저작권 소송에 휘말렸고, 유튜브는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저작권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루퍼트 머독은 구글에서 월스트리트저널이 검색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구글과 '신문 전쟁'까지 벌일 기세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회사가 콘텐츠 비즈니스를 모르거나, 적어도 한 번도 제대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구글의 혁신적인 엔지니어들이 보기엔 전통적인 미디어 회사들은 지나치게 고루하고, 독점적이며, 낡은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겠죠. 문제는 그래서 구글의 모델 또한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게다가 구글의 산업은 듣기는 좋은데 빚좋은 개살구 같은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우선 당장 구글TV가 일으킬 트래픽을 통신사와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습니다. 통신사들이 감사하다고 구글TV를 자신들의 광통신망에 받아줄 리가 없죠. 안드로이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트리밍되는 컴퓨터의 음악라이브러리, 애플리케이션의 자동 업데이트 등은 계속해서 3G망에 부하를 주는 모델입니다. 구글은 통신사의 망 투자에 대한 고려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애플리케이션은 어떤가요. 구글의 안드로이드 마켓은 애플 앱스토어보다 유료앱의 비율이 훨씬 적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성공한 개발자의 스토리'도 애플 앱스토어 개발자보다 훨씬 적습니다. 개방된 생태계라고 떠들어봐야 그 생태계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없이는 빚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이런 걸 꼬집으면 구글의 답은 이렇습니다. "수많은 좋은 무료앱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올라온다." 이봐요, 당신들은 광고로 돈을 벌지만 그걸 무료로 올린 사람들은 한 달에 100달러 용돈벌이 정도밖에 못하는걸요. 구글의 젊은 CTO 빅 군도트라는 이날 스티브 잡스의 폐쇄성과 애플의 독점욕을 수없이 비꼬며 애플의 사업 모델을 비아냥댔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구글의 '개방성'을 강조했죠. 그에 더해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구글은 데이터로 운영되는 회사다. 모든 데이터가 우리의 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봐요, 젊은 아저씨. 콘텐츠는 데이터가 아닙니다. 소설과 음악, 시와 영화, 드라마와 게임은 데이터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정서로 움직인답니다. 당신들은 그걸 몰라요.


전에 아이패드 관련 포스트를 쓰면서 제가 애플에게 가장 감동했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픽사의 '업'을 소파에 앉아 아이패드로 지켜보던 스티브 잡스의 모습은 애플의 잠재 소비자들에게 왜 저 기계를 사야 하는지 잘 설명해 줍니다. "애플은 늘 인문학과 기술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라고 얘기했던 스티브의 말을 제가 기사로 옮겼을 때, 신기술에 아무 관심도 없던 우리 회사의 간부들도 그 말에 감동했고 며칠 동안 아이패드 기사 얘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구글TV의 개방성과 기술적 혁신성에 감탄하면서도, "그래서 도대체 저걸로 뭘 보라는 거야?"라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져야만 했습니다.


구글의 젊은 분들. 삶은 데이터가 아닙니다. 삶은 피와 살과 사랑과 평화랍니다. 당신들은 그것도 데이터로 측정할 수 있나요?


우리는 왜 '이런 거' 못 만드나? 맘에드는 기사/칼럼

[원본출처]



대학에서 뉴미디어를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깨달은 게 있다. 기술과 사회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기술이나 혁신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소멸하는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사회적 형성'이라는 관점으로 한국사회를 살펴보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우선 "우린 이런 거 왜 못 만드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보자. 최근 들어 정계와 재계의 지도자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이다. 애플의 아이폰과 닌텐도의 게임기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윗분들'의 훈계 속에 양념처럼 들어가기 시작한 '유행어'기도 하다.

 

당사자가 의도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기술과 사회의 관점에서 '우린 이런 거 왜 못만드냐'는 물음은 상당히 전복적인 의미를 갖는다. '우리 사회는 왜 이 꼴이냐'고 묻는 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는 그가 몸담은 조직과 그 조직을 포함하고 있는 국가 모두를 의미한다.

 

  
▲ 애플 사의 오랜 모토는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다.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기업으로 평가 받는 애플의 저력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주는 사훈이다. 위계적인 기업의 문제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윗사람'의 생각이라면 특히 더.
ⓒ Apple
 애플
 

못 만드는 이유?

 

결론부터 말해 보자. 흔히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을 한다. 이 상황에 정확히 부합하는 말이다. '이런 거 왜 못 만드느냐'고 묻는 것은 질문자가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백하는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만들자'고 말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모두 지도자들이다. 조직에서 가장 강한 권력과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사람들 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거 왜 못 만드냐'고 묻는 지도자가 많을수록 그걸 만들어 낼 가능성은 낮아진다.

 

두 번째는 이런 질문을 태연히 던질 수 있게 하는 위계적 사회구조다. 위계 사회에서 '왜 못 만드냐'는 말은 질문이 아니라, 질타이고 추궁이며 명령이다. 여기서 자신의 책임은 빠져있다. (자기는 방법을 모르지만) '어떻게든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고 있을 따름이다. 

 

위계적인 조직일수록 소통은 막혀있기 마련이다. 이런 경직된 소통구조 속에서 창의력이 꽃 피기를 바라는 것은 '우린 왜 못 만드냐'는 질문만큼이나 어리석다. 그런 질문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 조직이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 수 없을만큼 위계적이고 경직되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게 두 번째 답이다.  

 

봉건적 위계사회의 비극

 

애플이 동기가 된, '이런 거 왜 못 만드냐'는 질문은 사실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 물음은 반성과 각성에 가까웠다. 왜 애플같은 회사가 일본에서는 태어날 수 없었느냐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혁신과 첨단기술의 대명사가 된 나라에서 말이다. 그 쟁쟁했던 소니, 도코모, 토요타의 일본에서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주목할만한 답변마저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 나왔다. 2008년 2월 25일자 <뉴스위크>가 '애플이 일제가 아닌 이유'를 설득력 있게 분석한 것이다. 크리스찬 캐릴 기자는 "창의력의 빈곤은 일본의 독특한 기업문화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수직통합된 대기업이 지배하고 있는 위계적 경제환경에서는 융통성과 창의성이 발휘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위계적 조직에서는 반대가 불가능하다. 반대가 불가능한 곳에서 창의적 사고도 불가능하다. 창의성은 기존의 생각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위계적 기업문화가 재계를 넘어 정치, 교육, 문화의 모든 영역까지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사회 전체가 단일 기업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일본 주식회사(Japan Inc.)'로 전락한 것이다.

 

기업 내부에서 반대가 불가능하면 밖에서 반대를 해 주어야 한다. 국민이, 언론이, 대학이, 정부가 말이다. 그러나 이들마저 기업조직의 일부가 되고 나면 창의력이 발휘될 여지는 사라지고 만다. '회장님' 좋아하는 언론이나, '기업이 선호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는 사회와 기업 모두에 해가 될 뿐이다.

 

하물며 정치 지도자가 '국가 CEO'를 자임하거나, 기업이 대학의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나라에서 희망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 애플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기업으로서의 애플이 갖는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애플은 변함 없이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서 있었다"고 말했다.
ⓒ 공개자료
 애플

 

애플과 인문학의 관계

 

현재 한국 교육계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이 변화는 '통폐합'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예컨대 음악과 미술 수업을 '통폐합'하고 (이런 '창의적 발상'이 가능한 나라에서 아이폰이 안 나온 게 놀라울 뿐이다), 초등학교에서 쉬는 시간을 5분으로 '통폐합'하고, 대학 전공을 "사회 변화의 요구에 따라" 절반 수준으로 '통폐합' 하겠다는 것이다.

 

쉬운 말로 하면, '노는 시간'을 없애고, '돈 안 되는 전공,' 즉 인문학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 뒤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승인과 지지가 있다. 정부는 이런 '교육개혁'을 주도하면서 '창의성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야심찬 "한국형 스티브 잡스 양성계획"도 나왔다. "탈락시스템에 따라 3단계의 검증 과정을 거쳐" 10명 안팎의 "소프트웨어 마에스트로"를 선정한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선발할지 모르지만, 대단한 '스펙'을 갖춘 실력자들이 몰려들 게 틀림 없다(조롱이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지원해도 탈락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어쩌나. 스티브 잡스는 한국 정부가 그렇게 없애고 싶어하는 두 골칫거리의 산물이니 말이다. 바로 '인문학'과 '노는 시간'이다.

 

지난 1월, 스티브 잡스가 신제품 '아이패드'를 선보인 날이었다. 그는 애플 사의 정체성을 설명하면서, 대형 스크린으로 표지판 사진을 보여주었다. 교차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내판이었지만, '길 이름'이 독특했다. 서로 엇갈린 두 개의 표지판에는 '인문학(Liberal Arts)'과 '기술(Technology)'이라고 쓰여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의미를 설명했다.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입니다. 애플은 언제나 이 둘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해 왔지요."

 

  
▲ 미국의 대학에서 인문학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은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인문/예술/사회과학 프로그램 웹사이트. "위대한 사상이 세계를 바꾼다"는 표어가 보인다. 하프를 연주하는 사진 오른쪽에 "컴퓨터는 음악이론을 배울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음악과 컴퓨터 기술을 접목시킨 최신 연구들을 소개하고 있다.
ⓒ MIT
 MIT

 

'미국식 교육'의 중심은 인문학

 

'미국식 교육'을 잘 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식 교육을 '돈 되는 실용교육'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지역과 규모를 막론하고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대학의 공통점이 있다. 하나 같이 뛰어난 인문학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첨단 기술연구로 알려진 매사추세츠 공대(MIT)는 훌륭한 철학, 언어학, 문학, 예술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으며,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

 

미국 대학의 전통은 크게 두 축이 있다. 연구중심 종합대학과 학부 중심의 인문대학이 그것이다. 인문학은 종합 연구대학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하지만,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라 불리는 학부 중심 인문대학에서 더욱 큰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오바마 대통령도 콜럼비아 대학으로 옮기기 전 '옥시덴탈 칼리지'라는 학부 인문대학을 다녔다. 비록 한 학기만에 그만 두기는 했으나, 스티브 잡스가 다녔던 '리드 칼리지'도 학부 중심 인문대학이었다. 그는 청강으로 들었던 서예수업을 '생애 최고의 수업'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생애 최고의 선택'으로는 '학교를 때려 치운 것'를 꼽았지만 말이다(게다가 대학 졸업 축사에서 이 말을 했다).

 

미국 대학이 '리버럴 아츠'라는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은 뭘까? 크게 세 가지다. 커뮤니케이션(소통) 능력, 비판적이고 윤리적 사고, 분야에 얽매이지 않는 폭넓은 교양.

 

미국에서 인문교육은 '취업에 도움이 되는 실무 지식이나 실용적 기술'의 반대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한국 정부가 싫어하는 것들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과정인 셈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런 '불온 교육'을 성공 비결로 내세운 것이다.

 

  
▲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리드 칼리지. 학부 중심으로 인문학적 교양을 가르치는 미국적 전통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 가운데 하나다. 스티브 잡스는 이 학교를 한 학기 동안 다닌 후 자퇴했다.
ⓒ 공개자료
 잡스

인문학, 왜 중요한가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실용주의가 발달했다는 미국에서 왜 '돈 안 되는' 교육이 대접을 받는 것일까? 간단하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돈만 되는 게 아니라, 더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인문학 교육은 '고전 교육'이다. 고전(classic)이란 세월이 흘러도 의미를 잃지 않는 인류의 성과물을 말한다. 실무용 지식과 기술은 하루가 멀다고 변하지만, 소통능력, 비판능력, 윤리의식, 보편적 교양의 가치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문학적 기초가 있는 사람은 실무 지식도 쉽게 배운다. 쉽게 배울 뿐 아니라, 제대로 배운다. 제대로 배울 뿐 아니라, 그 지식을 올바로 쓸 줄 안다. 하지만 그 반대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교육을 투자에 비유한다고 하자. 당신이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디에 투자하겠는가? 

 

지금 한국의 기업과 정부와 대학이 실패하고 있는 이유는 실무적 지식이나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소통능력, 비판능력, 윤리의식, 보편적 교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주장하는 '대안'은 죽어가는 인문학을 뿌리까지 없애고 그 자리에 단편적인 실용지식과 기술을 채워 넣는 것이다.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인문학에 존경심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미래 경쟁력의 토대인 창의력까지 죽이고 있다는 점이다. 인문학적 비판 능력은 '남과는 다른 생각,' 즉 창의력의 토대가 된다. 인문학이 강조하는 윤리의식은 배려와 협력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할 수 있게 해 준다. 한국에서 애플이 나올 수 없는 세 번째 이유다. 

 

  
▲ <와이어드>지는 2009년 6월호 표지기사를 통해 소셜 미디어 혁명을 다루면서 '신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온라인상에서 펼쳐지는 협력과 공유 운동이 경제모델을 새롭게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와이어드>는 이 새 경제모델을 "신 신경제(New New Economy)"라고 이름 붙였다.
ⓒ Wired
 신 사회주의

 

경쟁교육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

 

유치원생이 영어공부 하느라 놀 시간이 없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단다. '무한 경쟁 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이 성적을 비관해 아파트 난간에서 몸을 던진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단다. 자본주의는 경쟁체제이고, 경쟁을 권장해야 '선진 일류국가'가 될 수 있는 만큼, 이런 '부작용'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진국 문턱'에서 좌초하고 만다는 이야기다.  

 

국가 지도자가 '선진 인류국가'와 '선진국 문턱'을 말할 때마다 내 입에서는 이런 무엄한 소리가 흘러 나온다.

 

"젠장, 그 문턱은 길기도 하다…."

 

유치원 시절에 듣던 '선진국 문턱' 이야기를 중년이 다 되어서까지 듣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장담컨대, 내 생전에 한국이 '선진국 문턱'을 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비관적인 이유가 있다. 한국 정부가 말하는 '선진국'은 다가서면 사라지는 신기루다. 당나귀 머리 앞에 달아놓은 당근. 주인을 태운 당나귀는 당근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걷지만, 죽는 날까지 당근을 입에 대지 못한다. 그 당근은 새 당나귀의 머리에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내 비관론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정부가 말하는 '경쟁교육'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경쟁 교육은 나누고 배려하는 사람을 배출하지 못한다. 한국식 경쟁 교육에서 앞서가는 '비결'은 빼앗고 감추는 것이다.

 

그러나 리눅스, 위키피디아, 플리커, 앱스토어, 트위터, 페이스북의 성공에서 보듯, 뉴미디어 시대에서는 '나눔'과 '배려'가 새로운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와이어드>는 이처럼 협력에 기반한 미래의 공동체 경제를 '신사회주의(New Socialism)'라 부른다. 내가 나누면 남도 나눌 것이고, 공동체는 번영하게 된다.

 

모든 것을 떠나서, 서로 밟고 밟히는 곳에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이 한국인들의 행복지수가 낮고, 자살률이 높고,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이유다. 아이폰을 왜 못 만드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런 식의 경쟁체제를 유지하다간 '한국형 잡스'나 '선진 일류국가'보다 사회 붕괴가 먼저 찾아올 것 같으니 말이다.


자전거 부활 주전부리

근 3년 정도?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 기간동안 방치되고 썩어가고 있었던
불쌍한 자전거 2놈 중 하나가 오늘 부활했다...

차라는 놈이 정말 편하긴 하지만
가까운 거리를 갈 때라던가 주차문제 등 불편한 점도 꽤나 존재하기에
미루고 미뤘던 수리를 이제서야 한 것..

그래도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추억 중 하나를 만들어 준 놈인데(이거 이전에 타던 놈)
내가 너무 방치했지..

이제 깔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멀쩡하게 해놓았으니 앞으로 자주 이용해 주마..

다시 한 번 그대의 등을 내어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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